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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챌린지 마지막 주였습니다. 기록을 보니 92일째였어요. 그날 스마트워치를 차지 않고 나갔습니다. 페이스도, 거리도, 심박수도 확인하지 않고 그냥 달렸습니다. 처음엔 불안했는데 그날 달리기가 챌린지 전체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기록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처음 70일은 숫자에 갇혀 있었습니다
100일 챌린지를 시작하면서 저는 모든 걸 숫자로 관리했습니다. 거리, 페이스, 심박수, 케이던스까지 스마트워치로 측정하고 매일 기록했습니다. 5km를 38분에 뛰던 게 36분이 되면 그날은 좋은 날이었고, 다시 39분으로 늦어지면 실패한 날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런 패턴이 70일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매일 어제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어요. 나중에 찾아보니 이게 성과 지향적 동기(Outcome-Oriented Motivation)라는 개념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결과나 수치에 집중하는 동기 방식은 단기적으로 효과적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동기 소진과 운동 중단으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출처: Journal of Sport and Exercise Psychology).
제가 18번 글에서 겪었던 47일째 슬럼프도 사실 이 패턴의 결과였습니다. 숫자가 정체되거나 나빠지면 달리기 자체가 싫어지는 구조였던 겁니다.
92일째, 시계를 두고 나갔습니다
슬럼프를 겪고 페이스를 조정하면서도 여전히 숫자에 대한 집착은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다 92일째 되던 날, 충동적으로 스마트워치를 집에 두고 나갔습니다. 거의 100일 동안 한 번도 안 해본 일이었습니다.
처음 1km는 이상하게 불안했습니다. 지금 페이스가 빠른 건지 느린 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근데 2km쯔음부터 달라졌습니다. 숨소리에 집중하게 됐고, 낙동강 변 풍경이 평소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날 정확히 몇 km를 뛰었는지, 페이스가 어땠는지 지금도 모릅니다. 근데 그 달리기가 챌린지 100일 중 가장 만족스러운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경험을 몰입(Flow)이라고 부릅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정의한 개념인데, 목표나 결과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고 행위 자체에 완전히 몰두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몰입 상태에 들어가려면 역설적으로 결과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저는 시계를 두고 나간 그 우연한 선택으로 처음 몰입을 경험한 거였습니다.
기록과 거리를 내려놓고 알게 된 것들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하루는 시계 없이 달리는 날을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기록이 안 쌓인다는 게 아깝게 느껴졸 정도였는데, 그 느낌도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습니다.
기록을 안 보니까 몸이 보내는 신호에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페이스가 빠른지 느린지 숫자로 확인하는 대신, 숨이 차는 정도로 판단하게 됐어요. 이게 오히려 더 정확한 지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스마트워치 수치는 추정값인데 몸의 감각은 실시간 정직한 신호였습니다.
달리는 풍경을 보는 시간도 늘었습니다. 숫자에 집중할 때는 발끝만 보고 달렸는데, 기록을 내려놓으니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볼 여유가 생겼습니다. 낙동강 변에 계절마다 달라지는 풀과 나무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달리기를 대하는 태도도 바뀌었습니다. 매일 어제보다 나아져야 한다는 압박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꾸준히 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기록 경쟁에서 벗어나니 부담 없이 운동화를 신게 됐어요.
기록이 필요한 날도 있습니다
기록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터벌 훈련이나 마라톤 페이스 연습처럼 목적이 명확한 날에는 데이터가 꼭 필요합니다. 임계 속도를 확인하거나 훈련 강도를 조절할 때는 숫자가 있어야 정확한 훈련이 됩니다.
다만 모든 달리기가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92일째에 배웠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목표 없이, 숫자 없이 그냥 달리는 시간이 오히려 전체 러닝 생활을 더 오래 지속하게 만들어줬습니다.
100일 챌린지를 마치고 지금까지 달리기를 이어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 균형이었습니다. 기록을 쫓는 날과 기록을 내려놓는 날을 둘 다 가지면서, 달리기가 숫자 게임이 아니라 제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습니다. 목표 없이 달리는 그 하루가 결국 100일을 완성시킨 마지막 조각이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입니다.
참고: https://www.runnersworld.com/training/a20852005/running-without-tracking/